테마

‘랑의 엔진이 멈췄다. 아니 심장이다. 인간은 엔진을 심장이라 부른다’ 인간인 랑은 죽었다. 소설은 감정 없는 로봇인 고고의 시각으로 서술된다. 따라서 나도 이렇게 글을 열어볼까 한다. 민간인인 나는 죽었다. 이 글의 화자인 나는 감정 따위에 흔들려서는 안되는 군인이다. 하지만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기란 불가능함을 안다. 로봇 고고의 목소리 너머에는 인간인 작가가 자리한다. 그렇기에 로봇이 전하는 서사를 읽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 속에 묻어나는 감정을 느낀다. 이를 숨겨보려 딱딱한 단어를 고르고 골라 문장을 적어도, 움켜 쥔 전구의 빛이 가락의 틈 사이로 새어나옴을 막지 못하듯 감정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군인인 나의 뒤에도 민간인인 내가 있다. 총을 쥔 내 자세는 올곧지만 손끝은 떨려온다. 눈빛은 결의에 차 있지만 꽉 깨물어 다문 입은 치아의 떨림을 감추기 위한 것임을 나는 안다.

‘내가 전쟁에 쓰이기 위해 만들어졌을 거라고 말했지만 부정하고 싶다. 나는 나의 탄생이 지구의 생태를 전부 무너트린 전쟁에 쓰이기 위해서라고 믿고 싶지 않다’이런 고고의 회의는 우리와 많은 부분 닮아있다. 지금껏 누군가를 해친 기억은 전무하지만 존재의 본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상황이 오면 나도 누군가를 죽이게 되리라. 명령이 떨어지면 발포를 하리라. 그로 인해 상대는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리라. 그의 친족들은 그를 그리워하는 동시에 자손대대로 나를 증오하겠지.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스치지만 군인이기에 애써 무시하려한다.

‘한참을 걸어도 풍경이 달라지지 않는다. 달라지는 게 없으니 얼마큼 걸어왔는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다’ 군생활은 로봇 고고가 걸어가는 사막과 같은 막막함의 연속이다. 나는 어쩌다가 이 사막을 걷고 있는 걸까.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 걸까.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걸까. 풍경이 달라지지 않으니 방향도 거리도 가늠되지 않는다.분명 처음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모든 게 점점 희미해져간다.

‘저 아래로 가면 바다가 있어. 마지막 까지 살아남은 것들이 전부 모이는 곳. 파도를 바라보는 것밖에 달리 할 것은 없지만 첨벙이는 소리가 기가 막히거든. 거기로 갈 거야. 너도 가자’ 꿈도 의의도 없지만 평온하고 안전한 곳. 소설 속 바다는 그런 곳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그리로 모인다. 어쩌면 그리로 모인 이들만이 살아남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하지 말고 눈에 띄지 않게만 행동해. 입대를 앞둔 내가 가장 중복되게 들었던 조언이다. 눈치껏 조용히 처신하다가 무탈하게 전역하는 것이 군생활을 보내는 최선이라고들 한다. 어쩌면 그 말은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첨벙이는 파도를 멍하니 바라보다 편안히 눈감을 수 있는 곳. 부담과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바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황폐한 사막에서 어느날 갑자기 눈을 뜬 이들이 달리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그 누구도 살아남기 위한 바다로의 피난을 도망으로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 누가 이들을 질타할 수 있겠는가. 그래 나도 바다로 가야겠지. 어쩌면 내가 아직 의식하지 못했을 뿐, 이미 바다를 향해 발을 재촉하고 있었을지도.

‘낭설일지 모르지만 검은 벽으로 불리는 돌풍 너머에 그게 있대. 푸르렀던 시대로 돌아갈 수 있는 과거로 가는 땅. 거기 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온 인간은 없어’ 애석하게도 로봇 고고는 바다로 향하지 않는다. 소문만이 무성한 꿈의 장소인 과거로 가는 땅 . 고고는 그의 이름이 내포하듯 실제하는지 조차 확실치 않은 바다의 정반대 땅으로 나아간다.

‘검은 벽이 보인다. 모래 폭풍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의 고요함이 거짓처럼 느껴진다. 폭풍은 하늘을 가른 틈 같다. 넘어오지 말라고 거대한 칼로 그어놓은 선’ 우리에게 존재하는 또다른 선이 떠오른다. 그곳을 넘어 반격하던 용사들의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온다. 동시에 그 보다 큰 그들의 심장소리가 느껴진다. 꿈의 땅의 실체가 모래 폭풍임을 두 눈으로 확인했을 때의 감정은 절망이었을까.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그들은 진군을 멈추지 않았다. 남겨진 가족들을 위해. 우리의 조국 땅을 위해.

‘새 한 마리가 방향을 틀어 날아간다. 새는 생명이 있는 곳을 향해 난다. 새를 따라가면 분명 바다에 닿게 될 거다’ ‘드디어 기억났어. 내가 어떤 로봇이었는지. 나는 전쟁시대에 만들어졌지만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살리는 일을 했어’ 고고는 돌풍에 산산조각 나면서야 비로소 그의 의의가 죽음이 아닌 생명에 있음을 깨닫는다. 무사히 바다에 안착한 사람들에게 하고픈 말이 수도 없이 떠오르지만 이제는 전할 방법이 없다. 지켜낸 자들을 뒤로하며 사라져간다. 그가 로봇인 탓일까. 그의 표정에 후회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바다의 누군가는 느낄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다.

군생활의 후반에 접어들고서야 우리의 장성들이 남긴 유산의 윤곽이 선명해진다 . 그들이 지켜낸 이 땅 위에 우리가 서있다. 내가 쥐고 있는 이 총이 살생이 아닌 살리기 위함임을 이제는 안다. 떨려오던 손 끝이 점차 안정을 되찾는다. 굳어있던 표정이 서서히 풀어지며 외친다. 충성. 글자는 남지만 전하고픈 말은 다 하였기에, 끝으로 이제는 별이 되어 우리를 비추는 대한민국 장성들을 기리며 이만 줄이겠다.